본 발표에서는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근거를 둔 관상수시(觀象授時), 즉 “하늘을 관측하여 백성들에게 시간을 내려준다”는 유교적 이념이, 조선후기의 시헌력법의 채용과 시행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가를 살펴본다. <br />
관상수시라는 이념은 원래 유가철학에 기반을 둔 중국황제의 정치이념이었다. 조선은 국초(國初)부터 중국 황제의 제후국으로서 책봉(冊封)을 받는 입장에 있었기에, 형식적으로는 중국황제의 지배질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역서(曆書)는 이 책봉관계에서 황제의 권위와 지배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매년 조선에 하사되었기에,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자국의 역서를 갖지 못하고 중국의 역서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은 유교철학을 국가이데올로기로 삼아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유교군주국이 되고자 했다. 따라서 조선은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이념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자국의 역서를 만들어 백성에게 반포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에서 하사되는 역서와 자국에서 스스로 발행하는 역서를 함께 가지게 됨으로써, 조선의 역서는 형식과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상황이 되었다.<br />
이 발표에서는 이러한 책봉관계의 형식과, 유교군주국으로서 자국의 역서를 갖고자 하는 실질적 목표사이에서 시헌력이라는 새로운 역법이 조선에서 정착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병자호란 이후 청국과 군신관계의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의 피책봉국이 되어, 매년 청나라의 역서를 받아서 써야 했다. 청은 1645년부터 시헌력으로 개력하자 조선 또한 피책봉국의 입장에서 시헌력을 매년 받아서 써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br />
조선에서는 청국에 왕래하며 시헌력으로의 개력과 서양천문학에 대한 정보가 많았던, 소현세자, 한흥일, 김육 등에 의해 개력논의가 제기되고, 이어 10여년간의 준비를 거쳐 1654년부터 조선에서도 시헌력이 사용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동일한 역서를 사용함으로써 청의 피책봉국으로서 의무에 부응하며, 또한 국내에서는 관상수시 이념을 구현하는 유교적 군주국으로서의 위신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역법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습득한 시헌력 지식도 완전치 못하여, 시간이 경과되면서 청국 역서와의 차이가 드러났다. 조선은 보다 고급의 역법지식을 습득하여 청국역서와 동일한 국내역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1710년대에 들어서, 역일의 계산, 일월식의 계산, 그리고 칠정력의 작성을 포함한 전반적인 시헌력 지식을 모두 습득하고, 운용하게 되었다.<br />
이후 청은 역법의 기반 이론을 [서양신법역서]의 체계로부터 1726년부터 [역상고성]체계로 바꾸고, 다시 1734년 [역상고성]의 역원을 개정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된 역법이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에서는 다시 1742년 일월의 운행에 케플러의 타원궤도법을 적용한 [역상고성후편]의 체계를 사용하자 조선에서는 [역상고성]의 오성계산법과 [역상고성후편]의 일월운동 계산법을 동시에 배워야 했다. 청에서 역법이론을 수정함으로써 발생하게 된 조선역서와 청국역서의 차이는 1760년에 이후가 되면서 거의 사라졌고, 이때부터 조선은 시헌력의 운용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br />
특히 시헌력운용에 대한 자신감은 정조대에 들어, 역법의 계산결과를 청국역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기준으로 한 계산 결과 그대로를 역서에 반영하고자 하는 본국력 시행의 의지로 표출되었다. 시헌력 운용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에서 명실상부하게 본국력을 시행함으로써 유교적 군주국가로서 관상수시의 이념을 명실상부하게 실천하고자 의도했다. 정조시대에 조선은 절기 날짜가 청국 역서와 하루 정도 차이가 나는 자국 역서를 시행하기도 했다.<br />
그러나 조선에서 본국력의 시행은 원래부터 역서에 부여된 책봉관계의 매개물로서의 성격에 의해 지극히 제한되었다. 서울을 기준으로 한 계산대로라면 조선의 역서는 청국의 역서와 초하루가 다르거나, 윤달의 위치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에 조선은 계산결과 그대로 본국력을 시행할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사용하는 역서가 청으로부터 반사되는 역서와 다르다는 것은 책봉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br />
청조에서 시헌력을 채용함으로써 야기된 조선에서의 개력 논의로부터, 18세기 후반 정조대에 이르러 시헌력법의 완전한 운용능력을 얻게 되는 시기까지의 시헌력의 수입과 시행과정은 관상수시라는 유가사상의 이중적 구현과정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청국의 황제가 실천하는 관상수시의 결과물로서 청나라의 역서를 받아들이면서도, 국내적으로는 명실상부한 유교적 군주국이 되기 위해 스스로 관상수시의 이념을 실천하여, 자국의 역서를 제작하고 반포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