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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천문대였다 - 천문(연) 7일 한국천문학회에서 발표 - 2011-04-07

□ 한국천문연구원(원장: 박석재) 김봉규 박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7일 충북대학교 개신관) 초청발표에서 신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수록된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하여 이와 같은 결론을 얻었으며, 이 연구 결과는 4월 14일 영국 더렘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될 예정이다.
○ 김봉규 박사는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첨성대에서 천체를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과 질적으로 정밀해졌다는 것도 추가적인 자료로 제시하였다. (첨부 자료 참조)
○ 이번 연구에 의해 그 동안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을 잠재우고 천문대였음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따라서 첨성대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것을 증명한 것이다.
○ 김봉규 박사는 또한 이번 연구를 통해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1)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2)에서 그리고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3)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 주는 것이다.
○ 김봉규 박사는 또한 조선시대의 천문대인 관천대의 상단 모습이 첨성대와 비슷한 것으로 봐서 관천대 역시 첨성대를 본 떠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그림 1 참조). 그리고 선덕여왕의 즉위년부터 한참 동안 천문기록이 없다가 여왕이 죽던 해인 647년에 갑자기 천문기록이 많아진 것으로 봐서 첨성대의 완공 시기는 선덕여왕 말기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림 1] 첨성대와 관천대의 모습. 상단의 모습이 비슷하다.

첨성대와 관천대

1) 본피유촌 : 신라 6촌 중 하나인 본피부의 행사장으로 추정됨.
2) 문열림 : 신라 사천상제(四川上祭) 장소 4 곳 중 하나이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음.
3) 영묘사 : 경주의 남천(南川, 반월성 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강) 주변에 있었다고 함.

[첨부 1] 유성관측기록으로 분석한 첨성대의 역할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더욱 직접적이면서 확실한 증거는 신라가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기록한 다섯 군데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다. (표 1 및 그림 2 참조)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신라는 다섯 군데의 유성이 떨어진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월성에 둘, 황룡사와 반월성 사이에 하나, 삼랑사 북쪽에 하나, 그리고 황룡사 남쪽에 하나이다. 이 유성 모두를 관측할 수 있으려면 유성들이 떨어진 위치들이 둘러싼 원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데, 첨성대가 그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은 첨성대에서 이 유성들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림 2] 첨성대 완공 후 신라의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 

첨성대 완공 후 신라의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


첨성대 완공 후 유성이 떨어진 곳에 대한 신라의 기록들.
647년 2월
(음력 1월)  
 
정월 한밤중(丙夜밤3경)에 큰 별이 월성(月城)에 떨어졌다.
(삼국사기 열전 제 1,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동국통감 제 7권 삼국기)

647년 7월
(음력 6월)

큰 별이 월성(月城)에 떨어졌다.(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673년 2월
(음력 1월)

봄 정월에 큰 별(大星)이 황룡사(皇龍寺)와 재성(在城=月城) 중간에 떨어졌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 7,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710년 2월
(음력 1월)

봄 정월에 천구(天狗)가 삼랑사(三郞寺) 북편에 떨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8,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768년 7월
(음력 6월)

여름 6월에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으며 지진동(地振動)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9,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첨부 2] 첨성대 건립 전후의 관측기록 분포 자료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수는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 무려 10 배 이상 급격한 증가를 보인다. (그림 3, 및 표 2 참조) 이는 신라가 첨성대를 만들어 체계적인 천문관측을 했다는 첫 번째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첨성대가 만들어지기 전의 기록은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과 거의 비슷한 수준임도 확인했다. (표 2 참조) 


[그림 3] 시기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분포. 

[그림 3] 시기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분포로 침성대완공 이후 641년부터 740년 신라의 야간 관측 기록이 가장 높다

[표 2]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 분포.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 분포를 나타내었습니다.
년도 고구려 백제 신라 (침성대 전) 신라 (침성대 후)

39~40

1

0

5

-

41~140

1

2

7

-

141~240

8

4

5

-

241~340

4

6

1

-

341~440

1

6

1

-

441~540

0

3

2

-

541~640

2

3

3

-

641~740

4

0

-

38

741~840

-

1

-

27

841~935

-

-

11

21

24

24

76

100년 평균

3.0

3.5

3.4

26.7


○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질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보인다. 혜성처럼 누구나 나타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천문현상은 상대적인 비율이 줄고, 대신 행성이 달 뒤로 숨는 현상이나 순간적인 유성의 출현 등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이 매일 밤 관측해야 얻을 수 있는 기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유성의 경우 첨성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단순히 ‘유성이 떨어졌다.’는 정도의 기록에 불과하며, 이러한 기록은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인데,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신라의 기록에는 ‘유성이 어떤 별자리에서 나타나 어떤 별자리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의 유성관측 내용 비교 예. 

고구려
- 336년 4월 : 봄 3월에 큰별(大星)이 서북방으로 흘러 떨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6)
- 643년 11월 1일 : 보장왕 2년 9월15일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9)

백제
- 316년 4월 : 큰별(大星)이 서쪽으로 흘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제 2,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 390년 9월 : 이날밤 큰별(大星)이 진중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신라
(첨성대 전)
- 104년 2월 : 뭇별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는 맞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 467년 10월 : 큰 별(大星)이 북쪽에서 동남(東南)쪽으로 떨어졌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삼국사기 백제 본기 제 3)

신라
(첨성대 후)
- 718년 11월 : 유성(流星)이 묘수(昴宿)로부터 규수(奎宿)로 들어갔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8, 증보문헌비고)
- 823년 5월 25일 : 유성이 천시(天市)에서 일어나 제좌(帝座)를 범한 후 천시동북원(垣).직녀성. 왕량성을 지나 각도(閣道)에 이르러 셋으로 갈라져 북소리를 낸 후 사라졌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 10,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 규수: 안드로메다자리,           묘수: 황소자리,           천시 : 뱀주인자리 주변,
    제좌 : 헤라클레스자리 알파별, 왕량성,           각도 : 카시오페이아자리


[첨부 3] 발표논문 초록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과 첨성대의 역할
 김봉규
한국천문연구원, 연세대학교 천문대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된 신라의 천문관측기록 142건을 분석하였다.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첨성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100년당 평균 7건의 기록을 남긴 반면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는 100년당 평균 33건의 천문관측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가 만들어지기 전의 기록들은 주로 일식과 혜성 등 체계적인 관측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현상들이 대부분인데 반해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유성이나 행성 현상 등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에 의한 체계적인 관측이 필요한 현상의 기록이 더 많다는 특징도 있다. 특히 유성 기록의 경우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나타나고 사라진 천구상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특징도 보인다. 이는 특정한 곳에서 매일 밤 체계적으로 천문관측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647년, 673년, 710년, 768년에 관측된 유성은 떨어진 위치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 월성, 황룡사와 월성 사이, 삼랑사 북쪽, 황룡사 남쪽이다. 이 위치들이 대략 타원 상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 타원 영역 안에서 관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타원 영역 안에 첨성대가 있다는 것은 첨성대에서 관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시사한다. 특히 673년의 기록은 다른 유성 기록에 비해 떨어진 위치가 더 구체적인데, 이는 유성이 떨어진 위치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관측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첨성대의 위치가 그곳에 가깝다는 점에서 첨성대에서 이들 유성을 관측했을 거라는 강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림 4] 첨성대에서 본 일주운동.

첨성대에서 본 일주운동


[그림 5] 김봉규 박사.

김봉규 박사


□ 문의 : 한국천문연구원 전파천문연구본부 본부장     김봉규 02-2012-7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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